따뜻하게 내린 커피를 드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커피와는
조금 다를지도 몰라요
맛은… 쓰려나요
맛은… 시려나요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세요
하지만 말해주지 말아 줘요
나는 이미, 그 맛을 알고 있으니까요
어머니께
졸업하고 이탈리아에 와서, 벌써 2년이 지났네요.
처음에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했었어요.
“외롭겠지”라고 하셨죠.
그 말이 맞았어요. 정말 외로웠어요.
아버지를 닮았다고 어머니가 말하셨던 선생님은,
내 외로움을 이해해 주셨고,
그 외로움을 음악으로 달래주셨어요.
이탈리아 생활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혼자 사는 것도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보낸 1년간은
내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 되었어요.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선생님의 음악은 여전히 이곳에 있어요.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어머니, 올해는 6월 23일에 괜찮을까요?
그날, 그분을 다시 만나러 가려해요.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내가 다시 그 사람을 만나려는 이유를
어머니는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러니까, 부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나고 싶어요.
그냥, 그게 전부예요.
4월 13일
마에바라 케이이치
1.
가끔씩 열리는 자동문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신선함과는 거리가 먼 바람을 끌어들여 로비에 가득한 먼지 냄새를 더 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새롭게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또 한 대의 비행기가 일본을 떠날 준비를 마쳤음을 알리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힐끔 보니, 목표로 삼은 비행기가 도착한 지 벌써 30분 이상이 지나 있었다.
탑승객들이라면 이제쯤 짐을 받아서 슬슬 로비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늦네, 요.」
발밑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한다.
바닥에 내려놓은 손가방이, 마치 그녀의 마음을 걱정이라도 하듯이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셔츠 위에 걸친 흰 재킷은 불안을 자극하듯 눈부셨다.
할 일이 없어진 손은 저절로 자신의 치마 자락을 만지작거렸고, 그 어두운 옷자락을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만지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귀 가까이에서 울리는 듯했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쿨해져라, 나.
혹시 내가 찾던 사람을 이미 놓쳐버린 건 아닐까—
피어오르는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짐 수령장 쪽에서 나오는 사람들 무리를 눈으로 쫓는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모르는 사람들이 출구를 빠져나가고, 그런 사람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직 기억 속 그 사람의 얼굴과 로비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대조하고 있었다.
혹시 좌석이 비행기 뒤편이어서 늦어진 거라 해도, 이젠 슬슬 모습을 보여야 할 시간일 텐데…
이상한 긴장감이 온몸을 조여 오는 가운데, “쿨해져라, 쿨해져라…” 마치 주문처럼 되뇌인다.
도착한 승객들이 끊임없이 나왔던 그 문에서 더 이상 발걸음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시야 한켠에 들어온 한 남자의 모습이— 낯익었다.
도착한 곳에서 크게 한 번, 숨을 내쉰다.
군청색 청바지에, 연한 갈색 계열의 재킷을 걸친 편안한 차림.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본 지 1초, 2초가 지나고 그 몸은 기둥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다행이다.
손거울로 재빨리 화장을 정돈하고, 여유 있는 걸음으로 다가간다.
“——하로롱, 케이쨩. 오랜만이에요.”
천천히, 그 등 뒤에 말을 걸었다.
“응?”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를 내며 그 사람이 돌아본다.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드디어 찾은 것 같은 얼굴로, 뺨에 미소가 피어났다.
……역시 케이쨩이다.
나는 천천히, 내가 기다리던 사람 앞까지 걸어갔다.
6년 만에 재회한 케이쨩은 기억 속 그보다 조금 더 키가 커져 있었고,
전체적으로 더 다부진 인상도 있었다.
그래도 그 얼굴에는, 내가 아는 케이쨩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케이쨩이 약간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예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는데, 인사도 없이 멀뚱멀뚱 보기만 하고?
아, 설마 일본어 잊은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주변 사람들이 수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너무 큰소리 내는 건 안 좋아요?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방해되니까, 옆으로 좀 비켜주세요.”
“누구 때문인데, 진짜…” 라고 중얼거리며 케이쨩이 벽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나도 그를 따라가, 케이쨩 옆에 바짝 붙는다.
“……시온, 맞지?”
“네~ 시온이에요. 소노자키 시온.”
그렇게 말하고 잠시 기다려보지만,
케이쨩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왜 시온이 여기 있는 건데?”
결국 처음으로 튀어나온 말은 그런 것이었다.
“있으면 안 되나요?”
툭 쏘아붙이듯,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다른 할 말 없어요?’라고 귀를 잡아당겨서 말해주고 싶은 기분이다.
“자자, 가요 가요~”
나는 케이쨩의 손을 잡고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순간 가방을 움켜잡은 건지, 케이쨩 뒤쪽에서
덜그럭거리는 바퀴 소리가 들려온다.
“야—! 잠깐만! 멈춰! 멈추라고!”
케이쨩이 버티듯 팔에 힘을 주고,
그에 따라 바퀴 소리도 멎는다.
“……간다니, 어디로 가는데?”
그런 케이쨩의 말에는
어이없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히나미자와로 정해져 있잖아요~”
허리에 손을 얹고,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2.
“……있지, 나 유학 갈까 생각 중이야.”
엔젤모트 가게 안, 케이쨩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느닷없이 그렇게 말을 꺼냈다.
“……하아?”
내가 반사적으로 낸 얼빠진 목소리는, 시끌벅적한 가게 소음 속에 묻혀버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서는 아직 김이 오르고 있었지만, 옆에 놓인 팬케이크는 이미 식어버린 것 같았다.
케이쨩이 엔젤모트에 찾아온 건 지금으로부터 30분 정도 전의 일.
마침 아르바이트 중이던 내가 그를 맞이해서 자리에 안내했을 때,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을까?”
주문을 받으려는 순간,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봤다.
나는 ‘드디어 언니한테 마음이 생긴 건가’ 하고 착각해서,
“조금 있으면 휴식 들어가니까, 그때라도 괜찮으면요.” 하고 평정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별별 상상이 오갔고,
둘이 사귀게 되면 어떻게 놀려먹어줄까~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짱이 나에게 상담하러 온다는 걸 가게 점장이자 삼촌에게 말하고, 휴식시간 직전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서비스로 팬케이크 세트 두 사람 분을 챙겨서 기세등등하게 케이짱에게 돌아갔다.
“난 이런 거 시킨 기억 없는데?” 라고 의아해하는 케이짱에게,
“제가 쏘는 거예요.” 하고 최고의 미소로 내밀었다.
엔젤모트의 유니폼을 입은 채 케이짱의 맞은편에 앉아 “그래서요? 상담이란 게 뭐예요?”
잔뜩 기대하며 묻고는…
그 후 약 10분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어색한 분위기에, 나도 슬슬 착각이었나 싶어졌다.
대체 케이짱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혹시… 케이짱이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까지 했다.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상상을 하고 있는 거람, 나는.
사토시 군이 있는데도 말이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눈앞에 놓인 홍차 컵에 살짝 입을 댄다.
맑고 투명한 호박빛 액체가, 조용히 목을 타고 내려갔다.
사토시 군은 지금, 이리에 진료소 지하에서 '히나미자와 증후군'이라는 병을 치료받고 있다.
작년 6월, 히나미자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계기로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들었을 땐, 사토시 군의 실종 진실을 숨기고 있던 감독(이리에)에게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 일의 중대함을 이해하고 나선, 그에게 연민도 느끼게 되었다.
감독은 지금도 사토시 군을 고치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으니까.
그때 이후로, 나도 시간이 날 때마다 감독님의 허락을 받아 이리에 진료소에 들르고 있다.
매일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자주, 사토시 군을 문병하러 가고 있다.
엔젤모트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는 이유도, 사토시 군이 제대로 돌아왔을 때, 사토코와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사토코에게 사토시 군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 애는 아직도, 자신의 오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지내고 있다.
하지만 언니들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케이짱도—
“우리 아틀리에에서, 아버지 그림을 보고 있었거든. 나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 쪽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쨩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그 얼굴은 마치 열에 들뜬 아이처럼, 방금 본 영화에 감동한 것처럼, 정말로 순수하고— 무방비한 표정이었다.
……정말,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게 나 자신을 향한 말인지, 케이짱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한 타이밍을 보아 슬쩍 말을 끼워넣었다.
“……왜,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언니들한테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런 뉘앙스를 살짝 담아, 가시 있는 말투로 말했다.
“……다른 애들한텐 말하기 어렵고. 이런 얘기 털어놓을 수 있을 사람이라고 하면, 시온밖에 생각이 안 나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케이짱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뭔가, ‘좋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배려처럼 느껴져서 괜히 기분이 상해, 나는 괜한 심술을 부렸다.
“……그 말은요, 결국 나라면 눈물을 흘려도 된다는 거죠?”
“에……? 아,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저도요, 그런 얘기 갑자기 들으면… 울지도 몰라요……”
거짓 울음을 흉내내며 고개를 푹 숙이자, 역시나 테이블 건너편에서 케이짱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허리를 들썩이며 나를 들여다보려 하면서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물쭈물 서 있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케이짱은, 정말 장난치기 딱 좋네요~”
하고는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진심으로 걱정했던 내가 바보였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케이짱이 푹—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아—”
피곤한 듯 한숨을 쉬는 모습으로 보아, 정말로 걱정해줬던 모양이었다.
“아하하,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네가 원래 그런 녀석이란 걸, 완전히 잊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 그거 무슨 뜻인데요~?”
“말 그대로야…….”
지친 듯한 눈빛을 케이짱이 내게 던지면서, 자기 접시에 놓인 팬케이크에 손을 뻗는다.
“음, 맛있네…… 시온, 그거 안 먹을 거면 내가 먹는다?”
케이짱이 내 접시 쪽으로 포크를 뻗자— 간발의 차로 내가 그걸 피했다.
“왜 그런 식으로 되는데요. 저도 먹을 거예요!”
버럭 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자, 맞은편에서 케이짱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복수라도 당한 느낌이라 전혀 재미가 없었다.
짜증을 담아 팬케이크를 마구 썰어서 입안에 턱—하고 넣는다.
입이 가득 차서 우물우물 하고 있는데, 케이짱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숨기고 있었다.
—그 이후의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너무 화가 나서 케이짱의 팬케이크를 빼앗아 먹기도 했고, 반대로 내 걸 뺏기기도 했고.
최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헤어질 때, “진전 있으면 또 얘기하러 올게.” 라고 케이짱이 말했다.
나는 굳이 안 와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은 “상담 들어준 시온한테 예의가 아니니까.” 라고 했었다.
그 태도를, 조금이라도 언니 앞에서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또 보자.”
“네네, 다음에 또 봐요.”
케이짱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나니, 휴식 시간도 거의 끝나 있었다.
조금 전의 이야기들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 나는 다시 일에 몰두해 들어갔다.
3.
자동문 너머로 몸을 밀어넣자,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밖과는 달리, 냉방으로 유지된 실내 온도는 달아오른 몸에 꽤나 기분 좋았다.
……실내 공기만 좀 탁하지 않았으면 완벽할 텐데,
뭐, 그런 걸 신칸센 같은 데에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한 이야기겠지.
……하아, 숨막혀서 못 살겠다.
밀폐된 공간은 역시 나한텐 안 맞아— 그렇게 생각하자, 예전에 귀족학교에 갇혀 있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입학 당일 전까지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결코 뒤집을 수 없었던 그 '마귀 할멈'의 결정에 분해서 흘렸던 눈물도, 지금 와선 그저 아련한 추억일 뿐.
……하지만 데려가진 이후,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건 대체 왜일까?
……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단 거겠지—. 그렇게 혼잣말하며 투덜대는 사이, 케이쨩의 좌석까지 도착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작게 웃으며, 그의 옆자리에 살짝 앉았다.
“자, 맡아두었던 거.” 건네받은 것은, 나의 가방이었다. 도시락 사올게요—라며 지갑만 꺼내 케이짱에게 맡겨두었던 것이다.
“정말, 막 다루지 말아 주세요~”
케이짱은 잠깐 얼굴을 찌푸리더니,
“엄청 무거운데? 뭐라도 들었어?”
“아, 안 열어보셨군요. 꽤나 바람직한 태도네요.”
예상대로의 반응에, 속으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런 케이짱에게— 자, 이거요.”
“……이건?”
“보다시피, 도시락이잖아요? 자자~”
도시락 보자기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아……”
반찬과 밥이 완전히 뒤섞여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표정은 아무렇지 않게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흘러넘치지 않게 조심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뭐, 남의 가방을 함부로 열지 않은 보상 같은 거랄까요.”
당황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도시락을 내밀었다.
“얼른 드셔보시는 게 어때요? 케이짱, 일본 음식 먹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신칸센을 타러 갈 때까지 케이짱이 계속 중얼중얼 되뇌던 그 말을 떠올리며, 도시락을 내밀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항으로 향하던 도중에 가방을 거칠게 다룬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돌아가면 잔뜩 일본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그렇게 질리지도 않고 대답했던 기억이, 이젠 왠지 그립게 느껴졌다.
“시온은 괜찮아?”
“케이짱을 위해 사온 도시락이 있으니까요, 전 괜찮아요.”
계속 이쪽을 바라보는 케이짱에게
적당한 말을 덧붙인다.
“사실 그거, 제 도시락이었거든요? 케이짱이 너무 먹고 싶다고, 먹고 싶다고~ 계속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드리는 거라구요?”
휙, 얼굴을 돌리고는 역에서 산 도시락을 비닐봉지에서 꺼냈다. 말없이 도시락을 묶은 끈을 풀고, 나무로 만든 듯한 상자를 앞에 두고, ‘일회용 젓가락’이라고 쓰인 포장을 찢어내는데―
“같이 나눠서 먹자.”
뚜껑을 열려는 순간, 옆에서 휙― 손이 뻗쳐와 도시락을 낚아챘다.
“읏….”
하고 소리를 내며 돌아보니, 어깨를 으쓱한 케이짱이 있었다.
“분교 때처럼 말야. 상대 반찬 뺏어 먹는 거.”
“……드시고 싶지 않으신 거 아니었어요?”
“그런 말 안 했잖아. 재밌게 먹고 싶어서 그래.”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스스로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분위기 흐리는 말을 해놓고,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침울한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 있자―
“뭐, 시온이 안 먹겠다면,
나 혼자서 다 먹어버릴 거지만?”
―그건,
언젠가 있었던 장면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서로의 반찬을 뺏으려 포크를 맞부딪치던 그 짧은 순간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그렇지만 ‘즐거웠다’는 감정 하나만 남은 오래전의 추억.
그래서, 돌려줄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네요. 저를 상대로 반찬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쑥 하고 젓가락을 뻗어 케이짱의 도시락에서 가라아게를 하나 낚아챘다.
“아, 치사해!”
화를 내는 케이짱에게 “방심하셨네요.” 하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4.
눈을 뜬 그 앞에는, 온통 어둠으로 모든 걸 삼킬 듯한 공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심코 들어 올린 손에는 희미한 윤곽과 손가락이 굽혀지는 미묘한 감각만이 있었다.
어렴풋한 머릿속에 울리는 건 방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물이 땅에 스며들듯 점점 주변의 추위를 인식하게 되고,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을 찾아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춥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베갯머리에 시계를 두었다는 걸,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날, 밤 아홉 시를 넘겼을 무렵 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도 바쁘니까, 어서 숙제 하지 않으면 안돼……”
그런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에 던져버리며,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우리끼리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딱히 드문 일도 아니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뚝 끊기다시피 줄어들었다.
같은 반이 된 인연 덕분에, 대부분 학교에서 얘기하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로 얘기한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됐다.
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 직접 만나기엔 어렵거나, 갑작스러운 부탁이나, 꼭 전화로 전하고 싶은 일―
“……언니, 그걸로 괜찮은 거예요?”
“응, 뭐…… 케이짱이 결정한 일이니까……어쩔 수 없지.”
처음엔 아무렇지 않은 대화였다.
오늘 케이짱이랑 놀았고, 언니가 1등이고 케이짱이 꼴찌였다든가,
벌칙 게임으로 케이짱을 엄청 혼쭐내줬다든가,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이야기였다.
진료소에 다녀온 나는 부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토시 군이 깨어나면 나도 꼭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다.
“……그래도 케이짱 마음을 재촉하는 일은, 나는 하고 싶지 않아.”
“그럴 순 없죠! ……다음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언니의 이야기는, 케이짱이 유학을 간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쓸데없는 농담은 만우절에나 하시죠, 하고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말하려던 찰나―
언니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그제야 이제 본론이구나 싶었다.
“내일도 알바가 있어서, 짧게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텔레비전의 볼륨을 살짝 줄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름 끝자락에 케이짱이 나를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괜찮아! 언젠가는 돌아올 거잖아? 그러니까, 그때부터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바보……"
그렇게 언니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약해지고,
나도 모르게,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다리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을 계속 기다린다는 게,
그게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소리도 되지 못하는 잡음이, 텔레비전 너머에서 흘러나온다.
지금이라면 아직, 언니에게 말려들지 않도록 얘기해줄 수 있어.
언니가 케이짱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나 사토코가, 사토시 군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야말로, 언니의 그런 생각은 너무 안일하다며 말해줘야만 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케이짱한테 고백이라도 하라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설득한다 해도, 언니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려 들 테니까.
마치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듯이, 늘 다른 사람만을 생각하니까.
"……시온?"
갑자기 말없이 침묵한 나를 불안하게 여긴 듯,
언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미안해. 이런 일로 매번 전화해서……”
“괜찮아요.”
억지로라도 밝은 척하며,
그 김에 언니를 놀리는 것도 잊지 않고 말했다.
“……언니의 그런 점 덕분에, 나중에 또 장난 좀 칠 수 있겠네요.”
“우우! 나, 시온 싫어!”
그렇게 말하며 전화기 너머에서
“시온 싫어, 시온 싫어”를 연달아 외치는 언니.
정말로 싫다면 진작에 수화기를 내려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우리 사이에선 이게 일종의 장난스러운 애정 표현이니까.
“그럼, 이제 끊을게요? 케이짱이랑 있을 수 있는 시간, 언니는 원래부터도 별로 없잖아요.
내일도 일찍 일어나서, 케이짱한테 놀러 갈 거잖아요?”
“앗! 맞다! ……시온, 정말 고마워.”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기고,
남은 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삐—— 하는 전자음뿐.
방 안엔 갑작스레 고요함이 내려앉고,
텔레비전의 소리도, 화면의 불빛조차 그 고요 속으로 삼켜졌다.
“케이짱…… 이탈리아로 가버리는구나……”
침대에 누운 채로,
조용히 이마에 손을 얹고 속삭이듯 중얼거린다.
그 말은, 커튼 틈으로 스며드는 빛에 섞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냥 말해본 현실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조여왔다.
5.
케이이치에게
일본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정말 기대하고 있단다.
유학 중 있었던 이야기, 이것저것 들려줘.
편지로 그림 이야기를 많이 해줬지만,
역시 직접 만나서 듣는 것과는 다르겠지?
아, 그렇지.
올해 와타나가시 축제는 6월 16일로 정해졌어.
돌아온다면 그 전날에 히나미자와에 도착하는 게 좋을 거야.
거긴 시차도 있으니까, 비행기 예약할 때 조심하고.
귀국하는 일은 엄마랑 아빠만 아는 비밀로 해둘게.
너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여섯 해 동안 편지 주고받아서 엄마도 즐거웠단다.
고마워.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5월 1일
엄마로부터
6.
창문 너머로는 깊어가는 가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가로수의 나뭇잎들은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듯 단풍들어 있었다.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그런 날씨.
하지만 잠이 부족한 나에게는 그저 불쾌할 뿐이었고, 눈앞의 인물 때문에 짜증은 점점 더 쌓여만 갔다.
“다들 얘기했더니, 어찌어찌 이해해줬어.”
쓸쓸하면서도 기쁜 듯 이야기하는 케이짱이,
왠지 모르게 몹시 거슬렸다.
고개를 돌리고, 하품을 억누르며 어떻게든 잠들지 않으려고 애쓴다.
선배 알바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이쪽을 향하는 게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았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그런 시선들이, 오늘만큼은 따끔따끔하게 박혀왔다.
언제나처럼, 엔젤모트에서 알바를 하던 내게 케이짱이 찾아온 건 불과 몇 분 전.
쉬는 시간에 들어가서 탈의실에서 잠깐 눈 붙이려던 찰나의 일이었다.
“소노자키 씨를 만나고 싶다는 손님이 와 있어요.”
단지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단번에 눈이 번쩍 뜨였다.
평소라면 ‘나중에 와주세요’ 라든가 대충 이유를 붙여 거절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케이짱이 온 거다’ 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케이짱이 유학 얘기에 진전이 있으면 말하러 오겠다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최근 잠을 못 자게 만든 생각의 대부분이 케이짱 때문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케이짱의 유학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아마, 내가 짜증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거기 있었던 거다.
오늘, 케이짱의 모습을 본 그 순간부터.
언니와 전화로 얘기를 나눴던 그 밤부터.
아니면, 어쩌면 그보다 더 전부터.
케이짱의 입에서 "이탈리아에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쭉—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납덩이 같은 것이
심장을 안쪽에서부터 꽉 조여오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그 무게가 수면 부족과 겹쳐지면서
내 사고를 마구 뒤섞어 놓는다.
엉켜 있는 실타래를 더 엉키게 만드는 것처럼,
케이짱의 태평한 목소리가 짜증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케이짱의 머릿속은 이미 유학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기대와 불안을 안고 있는 케이짱을, 원래라면 나는 응원해줘야 할 입장인데.
“······어디든 마음대로 가버리면 되잖아요.”
작게 뱉은 내 목소리가, 어쩐지 아주 멀게 들렸다.
“시온?”
의아하다는 듯 말하는 케이짱의 얼굴이,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당신이 어디를 가든, 나한텐 아무 상관 없다고요!”
나는 큰 소리로 외쳐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매장의 소란은 사라지고
씁쓸한 공기가 퍼져나갔다.
기묘할 만큼의 정적이 귀를 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돌아가 주세요.”
한 번 그렇게 말하고 나니,
그게 마치 '올바른 말'처럼 느껴졌고,
지금은 그저 ‘돌아가’라는 말밖에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시온······ 그게 말이야·····”
“돌아가 달라고요!”
잠을 못 잔 탓일까, 아니면 그 외에 더 깊은 이유가 있었을까—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케이짱의 뒷모습을 눈끝으로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나는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상처받은 듯 한 케이쨩의 표정이, 수면부족으로 흐릿해진 내 머릿속을 사로잡아 놓아주질 않았다.
―왜, 케이짱이 떠나는 걸 이렇게까지 쓸쓸하다고 느끼고 있는 걸까.
내가 품은 그 물음에, 결국 케이짱의 뒷모습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소노자키 씨. 저기, 잠깐만」
케이짱을 내보내고 나서 한참. 드디어 나 자신도 진정되기 시작했을 무렵, 선배 웨이트리스가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쪽 좀 와줄래요?”
그런 뉘앙스로, 유리창 근처 자리에서 자꾸 손짓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엔, 사용한 접시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테이블 좀 닦아달라는 거겠죠, 아마.
다른 손님이 쓰던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나는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다.
행주의 깨끗한 면을 골라 접고는, 일단 선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슨 일이세요?”
말을 꺼내자마자, 하마터면 하품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도 선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창밖을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켰다.
“남자친구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던데?”
“······남자친구분?”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니—
“아까 그 사람이랑 싸웠잖아.”
길가에 멈춰선 택시들 너머로, 케이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아까 일이 생각나 얼굴이 저절로 찌그러진다.
“......딱히,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불쾌하다는 걸 전달하려고 목소리를 낮춘다.
착각도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나한테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아~ 네네. 알았어, 알았어.”
내 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정하라며 선배가 손을 흔든다.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저는 일하러 돌아갈게요.”
이 이상 할 얘기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행주를 놓는 대신 쌓여있는 접시를 집어 든다.
“오늘 말이야, 그냥 퇴근해. 점장님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그 사람, 기다리게 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딱히...... 그런 사이......”
“네가 왜 화났는지 나는 몰라. 하지만 그 애는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하니까 밖에 있는 거 아니겠어? 굳이 가게 앞에서.”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케이짱은 이상하게 고집불통이라, 분명 내 알바가 끝날 때까지 정말 계속 기다릴 것이다.
애초에 내가 멋대로 화내서 가게에서 쫓아낸 거니까,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케이짱은."
정신을 차려보니 케이짱에 대한 화가 다시 불붙어 있었다.
이렇게 되니 케이짱이 나쁘다고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반복하게 된다.
억지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갔다 와. 오늘 계속 졸려 보였고. 아까도 위험한 순간 있었잖아?"
나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엔젤모트 밖으로 나갔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하늘색과 차가워지기 시작한 공기가 조금 몸에 스며들었다. 여전히 케이쨩은 바보같이 자전거 보관소에 앉아 있었다.
"......정말이지."
"앗!"
"어떤 누군가 씨 덕분에 엄청 오해받았어요."
내 모습을 알아보고 얼빠진 소리를 내는 케이짱을 잔뜩 불쾌하게 쏘아붙였다.
“음, 시온...?”
당황한 케이 짱이 무언가 물어보려 하는 것을, 노려봄으로써 침묵시켰다.
기세에 눌려 한때 침묵했던 케이짱은, 그래도 여전히 물고 늘어지려 하며,
"......이쪽 얘기예요. 가요."
추궁을 피하기 위해, 그 팔을 붙잡았다.
"간다니, 어디로?"
"됐으니까! 빨리 가요!"
멍하니 서 있는 케이짱을 억지로 끌어당겨 걷게 했다. 향할 곳 따위는 정하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벗어나야겠다고만 생각했다. 뒤에서 자전거가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결국 적당히 걷다가 공원을 발견하고 우리는 그곳 벤치에 앉았다.
가게를 나올 때까지 케이짱에게 어떤 불평을 쏟아낼지 잔뜩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해야 할 말을 잃어버렸다.
케이짱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색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서로 말없이 침묵한 채 시간만이 흘러갔다. 붉게 물든 하늘에는 갈 곳을 잃은 달이 둥실 떠오르듯이 떠 있었다.
"………………시온, 저기 말이야."
"뭔데요."
케이짱이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까는 미안."
"괜찮아요. 제가 멋대로 화냈던 거니까요."
"……………음, 내가 뭘 잘못한 거 아니야?"
"맞아요. 케이짱이 기분 상하게 했어요."
홱 고개를 돌리고, 케이 짱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사과해도 용서 안 해줄 거예요."
"아, 으음...... 그...... 그래도 미안."
그런 케이짱의 모습에 한숨을 쉬더니,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조금, 케이짱이 없어지는 게 쓸쓸하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케이짱이 조용해졌다.
나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되도록 케이 짱 쪽은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정말, 정말, 정말로. 조금 쓸쓸하네, 하고."
"———돌아올 거야."
"에..............."
내 눈앞에는 나를 향해 뻗어 있는 손. 그 너머에는 살짝 표정을 풀고 있는 케이 짱이 있다.
홀린 듯이 나는 케이짱을 바라보고 있었다.
횡설수설하는 케이짱의 목소리. 아까의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갑자기 내 머리에 무언가가 닿는다.
"몇 년이 지나도, 반드시 돌아올게....... 약속이야."
처음 보는 그 얼굴은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듯했다. 그 안에 박힌, 한없이 곧은 눈동자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투박한 손이 떨어지고, 동시에 나는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거, 나한테 할 말 아니지 않아요?"
"아니, 그...... 으음......."
하지만 나는 분명히 말해줘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내가 케이 짱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일 테니까.
조용히 숨을 내쉬고, 등을 밀어주듯이 웃었다.
"——약속이에요? 제대로 건강하게 돌아와서, 모두와 다시 만나는 거예요?"
7.
사람이 없는 열차 안에는 다른 몇 명의 승객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각자 문고판을 읽거나, 바깥 풍경을 바라보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자, 케이짱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달리기 시작한 열차의 진동이 케이짱과의 대화에 끼어들려는 듯 차내에 울렸다.
천천히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양은 아직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시온 말이야. 의외로 그림에 대해 잘 아는구나 싶어서."
"후후후,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무심코 목구멍에서 새어 나올 뻔한 말을 삼키고, 볼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케이짱은 팔짱을 낀 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고야에서 특급 열차로 갈아탄 우리는 자연스럽게 케이짱의 유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당연히 그림 이야기도 나왔고, 그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대답했는데, 케이짱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뭐, 당연한 거겠죠.
케이짱의 모습이 우스워서 몰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뭐, 너한테는 끔찍한 일을 당했던 기억밖에........."
싫은 일이라도 떠올랐는지, 찌푸린 얼굴로.
".........있잖아, 왜 공항에 있었어?"
벌써 몇 번째인지, 재회했을 때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저는 사소한 건 신경 안 써요." 홱 고개를 돌리고, 쐐기를 박듯이.
"끈질긴 남자는 미움받아요, 케이짱."
"시끄러워!"
"참고로 케이짱. 거기서 애인이라도 생겼어요?"
"뭐,......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세차게 뛴다.
"후훗...... 딱 봐도, 못 만들었죠?"
"그럴 시간 같은 건 없었어. 거기 생활에 좀 익숙해지는 데만 몇 달이나 걸렸고, 그림 공부만 계속하고 있었고......"
거기서 한 번 말을 끊고, 귓속말하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서는,
"저기...... 하나 물어봐도 돼?"
진지한 듯 케이짱이 물어온다.
"......이런 데 있어도 되는 거야?"
"무슨 뜻이에요?"
"......하?"
케이짱의 말투는 너무 모호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무슨 뜻이라니...... 너, 사토시는......"
"아, 사토시 군과는 헤어졌어요."
그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자, 그런 거였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요, 사토시 군과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에요."
놀란 비둘기라는 게 이런 얼굴을 할까. 케이짱의 눈은 점이 되고,
"아, 사토시 군은 제대로 돌아왔는데...... 뭐,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헤어져 버렸어요."
케이짱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다.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내뱉듯이 말을 이어간다.
"사귀는 데까지는 갔던, 거지?"
"글쎄요...... 제가 좀 돌봐준 것뿐이고요. 사토시 군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확인해 본 적 없으니까요."
잠시 동안의 침묵.
케이짱은 시선을 허공에 헤매다가,
"왜 또 그렇게 된 거야? 너, 그렇게 사토시를......"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옛날 일이에요...... 듣고 싶어요?"
"딱히, 됐어."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케이짱은, 그래도 그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을 알기 쉬운 것도 히나미자와에 있을 때와 변함이 없어서, 왠지 모르게 묘하게 기뻤다.
"뭐, 그렇게 듣고 싶다면 특별히 이야기해 줄게요."
"너...... 남의 말 좀 들어라."
반쯤 들을 태세가 된 케이짱이, 어이없다는 듯 턱을 괴었다.
"음, 어디부터가 좋을까요?"
그렇게 항의하는 목소리를 완벽하게 무시하고, 나는 기억의 실을 더듬어 끌어당겼다.
유난히 또렷하게 들린 차내 방송은 히나미자와가 아직 멀리 있음을 알려주었다.
8.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는 쓰르라미 소리가 들려와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있었다.
꽃병의 물을 갈아주자, 탁한 색의 물이 흘러내려갔다.
...............벌써 두 달이 되었네요.
도자기 표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토시 군의 의식 회복은 적어도 나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쇼와 60년 어느 날, 사토시 군은 긴 잠에 지쳤다는 듯 눈을 떴다. "언제 의식이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아요." 라고 담당 의사가 전부터 말했지만, 좀처럼 기다리던 순간은 오지 않아서, 당시 나는 사토시 군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이해는 했지만, 사토시 군은 여러 가지 기억의 혼란이 있었고, 나 자신의 존재에 좌절할 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토시 군에게 품었던 마음은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사토시 군의 귀가를 나보다 더 기다리고 있는 사토코를 생각하면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꽃병에 꽃을 다시 꽂고 세면장을 나선다. 진료소의 타일을 두드리는 구두 소리가 쓰르라미 소리에 섞여 조용히 복도에 울린다.
사토시 군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은 한참 후에 언니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진료소 지하층에 계속 갇혀 지내는 건 힘들 테고,
사토시 군도 친숙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는 생각이 계기가 되었다.
감독에게 믿을 수 있는 상대라고 부탁하자, 쓴웃음을 지으며 승낙해 주었다. 감독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사토시 군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하는 답답할 테니 언니를 만나기 전날 사토시 군의 병실은 진료소 2층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로는 가끔 언니도 사토시 군을 만나러 와주는 것 같았고, 사토시 군이 가끔 "시온이랑 미온은 구별이 안 돼"라고 말하곤 했다. 왠지 모르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사토시 군을 위한 일이니까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장 큰 걱정은 다른 마을 사람들이나 사토코에게 들키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문제없는 것 같았다.
익숙해진 병실 문 앞에서 가볍게 노크했다.
"......사토시 군? 저예요, 시온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갔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인기척은 보지 못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사토시 군!"
침대에서 머리를 감싸고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고 있는 사토시 군이 있었다.
머리가 하얘진 것은 몇 초 동안이었다. 달려가려던 순간 손에서 미끄러진 꽃병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런 건 바로 잊어버리고 나는 곧장 사토시 군 곁에 도착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빠른 말로 다그치듯이 물었고,
"......나는, 사람을 죽였구나."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사토시 군. 기억났어요...?"
"......응...... 내가, 숙모님을 죽였어."
그때의 감촉을 떠올리려는 듯, 사토시 군이 손을 내려다봤다. 끈적하게 묻었던 핏자국은 마치 그곳에 남아있는 것처럼,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사토시 군이 자신의 숙모를 죽인 것은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토시 군이 한 일을 옳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우리가 사토코를 숙부에게서 구했던 것처럼, 다른 방법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단지, 숙부 부부에게 실컷 괴롭힘을 당했던 사토시 군과 사토코의 상황을 보고, 댐 전쟁 때부터 마을에서 따돌림당하던 상황을 이해하고, 옳다고 생각할 만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이렇게 되었을까?
"감독은 따로 범인이 있다고 했지만...... 신경 써 준 걸까?"
"그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민하는 사토시 군을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데,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위로하려 해도, 격려하려 해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마음인데도, 제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안 돼. 어떤 이유가 있었든 간에...... 내가 숙모님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도, 나는 사토시 군들이랑......"
"만지지 마!"
"아..."
사토시 군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벽으로 밀쳐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닥에 쓰러졌다.
사토시 군은 순간 놀란 얼굴을 하고는 이내 미안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미안...... 하지만 이런 손으로...... 시온이나 사토코를 만져서는 안 돼."
몹시 상처받은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해야 할 말을 잃었다.
"어라? 왜 문이 열려 있지?"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뒤를 돌아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복도 너머에서 언니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이 비상 상황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타난 걸까? 지금은 사토시 군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는데.
하지만 방 안의 상황을 보자마자, 언니는 평소의 느긋한 분위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면 같은 표정으로 말없이 사토시 군 곁으로 걸어갔다.
"아파......"
언니가 사토시 군의 뺨을 때렸다.
"어, 언니......?"
지금껏 본 적 없는 모습에, 나는 그저 "언니"라고만 불렀다.
"......왜, 시온이 바닥에 쓰러져 있어?"
"......그건......"
"왜, 꽃병이 깨져 있어?"
"언니...... 그, 그냥 내가 좀 덜렁거려서......"
"왜 시온이 울고 있는거야!"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 왜? 왜 내가 이러고 있지?
번지는 시야 너머에서는, 말을 퍼붓듯이 소리친 언니가 사토시 군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목이 졸리는 듯한 자세가 되어서인지, 사토시 군이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언니! 사토시 군, 병색이 완연해서......."
"시끄러워! 너는 입 다물고 있어!"
최대한의 항의는 그 이상의 항의가 담긴 목소리에 묻혀,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이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은 거잖아! 소노자키 가문이! 너희들만 없었으면, 나는!"
그런 언니의 태도에 불이 붙었는지, 온화하던 사토시 군도 결국 분노를 터뜨렸다.
그것은 예전의 말다툼과 비슷했다.
'미온'의 모습으로 분교에 다니던 내가, 교실에서 사토코를 밀쳐 넘어뜨리고, 사토코에게 온갖 심한 말을 퍼붓다가 사토시 군에게 욕설을 되받아쳤던 그 기억.
그런 사토시 군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가 싫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사토시 군과 사토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맹세했는데.
하지만 목구멍에 무언가가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느다란 숨소리만 새어 나올 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브라운관 속에서 펼쳐지는 흑백 영화를 보듯이 어딘가 무심함을 풍겼다.
"그래. 우리, 소노자키 가문이 사토시의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었지."
담담한 어조로 언니가 중얼거리고, 사토시 군은 그에 증오가 담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말이야, 시온은 그런 소노자키 가문에 늘 반발했어. 사토시네 일도, 사토시네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괴롭히냐고."
언니의 손이 사토시 군에게서 떨어지고, 속박에서 풀려난 사토시 군이 연신 기침을 했다.
여기서는 언니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응? 도시락까지 만들어서 사토코의 편식을 없애려고 하고 있어. 시온 말이야, 사토코를 부탁한다고, 사토시에게 부탁받았다고. 여러모로 신경 써주고 있다고."
그 한마디가 병실에 가득 찼던 열기를 식혀갔다.
아까까지 잠잠했던 쓰르라미가 울기 시작했고, 그제야 주변이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못된 짓 해서..............."
눈물 섞인 작은 목소리.
"...............미온...............?"
"내가...............모두에게 말할 수 있었는데...............그랬다면...............사토시...............숙모를 죽이지 않아도 됐겠지."
사토시 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순간, 나는 언니의 앞뒤 없는 말에서 하나의 사실에 다다랐다.
...............언니는 사토시 군이 숙모를 죽인 것을 알고 있었나?
방 앞에서 우연히 들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들어왔을 때의 언니의 모습이 너무 이상했다. 분명히 지금 막 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생각과는 달리, 언니가 사토시 군을 향해 무언가를 말했다.
도중에 들리지 않았지만, 사토시 군의 얼굴에 동요가 스친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얼굴을 닦고, 언니는 한번 코를 훌쩍이더니 "시온에게 사과해"라고 말했다.
내가 잘 아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9.
"언니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결국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그때부터였어요.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게 된 건."
그리고 내가 사토시 군에게서 멀어지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다.
밖에는 불타는 듯한 하늘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빨간색과 흰색이 섞인 구름은 음영이 더해지면서 어딘가 종교화 같은 모습을 자아냈다. 마치 하루의 끝을 황야에서 기도하는 여행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깝네."
창틀에 기대어 케이짱이 내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복잡한 표정인 것은 나를 배려해 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런 분위기를 풍기면 이쪽도 끼어들 수 없게 된단 말이에요."
"뭐야.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있잖아."
"당연하죠. 첫사랑 상대였으니까요."
좌석에 기댄 고개를 케이 짱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미성년자라서 보호 관찰 처분이 내려졌어요...... 사토시 군은 납득하지 못했지만."
"사토시는 그 후에 어떻게 됐어? 그, 숙모 일 말이야......"
사토시 군이 경찰에 자수한 이후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가 꽤 많이 도와줬대요...... 사토코에게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불안해하는 사토코를 안심시키는 데 애썼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르게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랬구나. 시온도 노력했구나."
"뭐, 뭐예요?"
"사토시네를, 뒤에서 도왔잖아?"
그렇게 말하며 케이짱이 웃었다.
왜 이럴 때만 이 남자는 날카로운 걸까.
"........뭐, 의외로 잘 어울리는 둘이고요. 결혼한 후에도 잘 지내는 것 같아요."
"......... 하......? 저 녀석들 결혼했어?'"
" 네, 작년 봄쯤에요. 사토시 군의 맹렬한 대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미온'과 사토시 군 때문에 다툰 일은 말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마지막 발버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판 싸움이었다. 그 싸움 덕분에 나와 언니는 '미온'과 '시온'이라는 이름에 대해 정말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아마도—
"미온은 나한테 반해 있었는데~ 같은 생각 하고 있어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케이 짱에게 놀리듯이 말을 건넸다.
"아니거든. 게다가 그거 처음 듣는 소리인데?"
즉시 부정한 뒤, 케이 짱이 쓸쓸한 얼굴로.
"내가 알던 것들이 변해서 말이야. 미온도 그렇지만, 시온은 분명 사토시랑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변하지 않는 건 없어요. 운명 같은 건 금붕어 잡기 그물보다 훨씬 쉽게 찢어져요."
"그런가." 쓴웃음을 지으며 케이 짱이 대답했다.
"오키노미야" 라는 단어가 들린 건 그 직후였다.
"차 있으니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역에서 헤어져 차로 짐과 케이짱을 태우고 40분.
우리는 히나미자와의 자갈길을 달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쓰르라미 소리는 풍경 같았지만, 식지 않는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케이짱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전혀 일어날 기미가 없는 것으로 보아 꽤 피곤한 모양이었다.
"슬슬 집에 도착해요, 케이 짱."
멀리서 케이짱 집의 하얀 벽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으응..." 눈꺼풀을 비비며 케이짱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 잠들었던 건가?"
"네, 아주 푹요. 실컷 잤어요."
귀여운 잠자는 얼굴이었다고 덧붙이며, 담장 옆에 차를 세웠다.
밖으로 나와 실감하는 것은 도시와는 다른 하늘의 넓이와 공기의 맑음일까. 겨우 돌아왔다는 생각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음~ 편안하네요~"
기지개를 켜며 옆을 향해 말을 걸다가,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케이 짱이 이동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멍하니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는 뒷모습에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히나미자와의 하늘은 변하지 않았구나...... 엄마 편지로 히나미자와가 변했다고 들었거든......"
뒤돌아보며 케이 짱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시온. 물어봐도 돼?"
"......네."
"줄곧 편지 보내줬던 거, 시온이었어?"
"......왜요?"
따지는 듯한 말투가 아닌, 케이짱의 질문.
문득 풀어진 표정은 약속했던 그날의 케이짱과 겹쳐졌다.
"......맞아요. 케이짱이랑 편지 주고받던 거, 저예요."
어깨 힘을 빼고 뒷짐을 지며,
"처음엔 케이짱의 어머니가 했는데...... 케이짱이 유학 간 다음 해였나. 케이짱이랑 편지 주고받는다고 듣고, 부탁해서 대신하게 됐어요."
언제 눈치챘어요? 싸구려 서스펜스 드라마의 단골처럼 케이짱에게 물었다.
"확신은 없었어. 하지만 공항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적어도 시온은 편지 내용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혹시나 해서."
"떠본 건가요...... 중간부터 편지 필체가 바뀌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요?"
"엄마 글씨는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어......"
케이짱은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쓴웃음을 지었고, 나도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얼굴만 마주 보는 짧은 침묵.
그것은 공항에 마중 나간 것을 말하는 걸까.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케이 짱의 귀환을 계속 기다렸던 것일까.
"왜일까요."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온다.
"분명 돌아온다고 케이 짱이 말해서...... 왠지 모르게 기다려 버렸어요."
바보 같죠, 마지막에 그렇게 덧붙이며 땅으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이유 같은 건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날의 케이짱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도 반드시 돌아온다고,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단언했던 케이짱의 곧은 눈동자가 잊히지 않아, 때때로 되살아났다.
잠들어 있던 사토시 군의 간호에 좌절할 뻔했을 때.
언니와 사토시 군이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다녀왔어."
문득, 머리에 무언가가 닿는다.
올려다보니, 케이짱이 나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쓰다듬는 그 손에는 이전과 변함없는, 투박한 감촉이 있었다.
"어서 와요."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케이 짱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느새 쓰르라미 소리는 멎고, 밤이 다가온 하늘에는 낮을 내일로 밀어내듯이 붉은색과 검은색의 그러데이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남겨진 것은 나와 케이짱, 그리고 앞으로의 일과 편지와 함께 쌓아 올린, 머나먼 날들의 추억이었다.
'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임🔞(1) (모브시온) (0) | 2025.05.08 |
---|---|
사라져 가는 귀신 (시온미온) (0) | 2025.04.28 |
무제🔞(시온미온) (0) | 2025.04.28 |